제 58회 : 다이한냐 나가미츠(대반야장광)

2021. 10. 29. 22:51검과 마법의 박물관/무기편





13대 정이대장군(주1) 아시카가 요시테루(足利義輝)

주1 정이대장군(征夷大將軍) : 세이다이쇼군, 쉽게말해 군 최고 사령관이라고 보면 된다. 대표적인 예로 많이 알고 있을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정이대장군 즉 최고군수권자이다.
 

 장군이라고 하면, 기본적으로 검술과 무예를 몸에 익혔다고는 하나 , 일류 무예자로서 활약하진 않고 , 어느 쪽이라 하면 한발 물러서서 대국(전체상황)을 보며 군대를 통솔하는 이미지가 강하다. 그러나 , 그중에는 무예를 뽑내는 장군도 있었다. 그것이 13대 정이대장군 아시카가 요시테루(1536-1565)이다.
 요시테루는 1536년 3월 31일 , 무로마치 막부 제 12대 장군인 아시카가 요시하루의 아들로 태어났다. 당시 , 막부의 힘은 쇠퇴하여 , 유소년기의 요시테루는 아버지 아시카가 요시하루와 함께 쿄토로 무사히 달아났지만, 장군가 라고 해도 괴롭고 힘든 생활을 맛보았다..
 11살 나이로 아버지 아시카가 요시하루가 장군직을 물러나자 , 요시테루는 무로마치 막부와 장군의 권위와 부흥을 위해서, 일생을 바치게 되었다.
 그러나 불운은 계속되었다. 취임한지 얼마되지 않아 미요시 나가요시가 키나이(畿內 주2)에 일대정권을 확립 , 요시테루는 쿄토에서 쫓기게 되었고 1550년 , 아버지 요시하루가 오우미에서 사망한다. 그러나 , 거듭된 전투 끝에 , 요시테루는 적대적이였던 미요시 나가요시와 화해 , 그를 무로마치 막부의 요직으로 받아들여 쿄토에 돌아오게 되었다. 이 시점에서 완전한 꼭두각시 정권이 되어버렸다고 하는 설도 있지만 , 필자는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았다.
 왜냐면, 요시테루는 장군으로서 유력 영주들과의 분쟁에 중재로 나오는 일도 많았고 , 또 유명한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 , 시마스 타카히사와 오오토모 소우린의 조정역 맡은 등 , 이러한 정치 활동이 결실을 맺어 , 오다 노부나가 , 우에스기 켄신 , 오오토모 소우린 , 사이토 요시타츠등이 상경해 요시테루와 회견 하였다. 그 때에 , 오오토모 소우린에 서 화승총도 받기도 하였다. 그 밖에도 , 자기 이름의 뒷글자 「테루(輝)」의 글자를 , 모리 테루모토(毛利輝元) , 다테 테루무네(伊達輝宗) , 우에스기 테루토라(上杉輝虎)(우에스기 겐신)로 정하여 주었고, 이전 이름인(개명전 혹은 아명일때) 요시후지(義藤)에서 「후지(藤)」 글자를 , 호소카와 후지타카 와 아시카가 후지우지에게 주기도 하였다. 단순한 꼭두각시 정권이었다면 , 누가 이름의 한글자를 받을려고 했을까,혹은 또 줄려고 했을까. 당시 상황에 대해 , 장군으로서 강한 권력이 있었는지 어떠했는지는 정확히 알수없지만 , 요시테루가 강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틀림 없을 것이다

주2 키나이 : 정확한 뜻은 모르겠으나. 수도를 둘러싼 지방도시정도인듯. 총 다섯 지역이라고 한다.

 검호 장군

 요시테루의 별명중에 「검호 장군」이 있다. 이것은 문자 그대로 , 요시테루가 검술에 뛰어났음을 나타내는 별명이다.
 요시테루에게 검을 가르친 것은 , 카시마 아라타토우 류(鹿島新?流)의 개조인 츠카하라 보쿠덴 이라고 전하고 있다. 츠카하라 보쿠덴이라면 , 삼대고류검법(三大古流劍法)의 한가지인 카토리 신토우류(香取神道流)를 배워 , 카시마 아라타토우류를 연 검호다. 카토리 신토우류나 카시마 아라타토우류에서는 , 상대의 칼을 받아 치는 표(겉)의 형태를 연습했지만 , 그것과는 별도로 리(뒤, 속)의 형태가 있다. 이것은 칼을 손상시키지 않고 상대의 전투 능력을 빼앗는 것으로, 적의 경동맥이나 근육을 베는 것이라고 한다. 물론 , 실전에서 사용되는 것은 후자의 형태다. 덧붙여서 요시테루는 카시마 아라타토우류를 배워 오의를 전수 받았으니, 상당한 실력자라고 생각된다.
 검호로서 요시테루를 말하는데 , 그의 죽음에 대한 에피소드를 빠뜨릴 순 없다. 1565년 , 마츠나가 히사히데(松永久秀)와 미요시 삼인방(미요시 나가야스(三好長逸) , 미요시 마사야스(三好政康) ,이와나리 도모미치(岩成友通))은 , 요시테루가 있는 쿄토 니죠의 어소(왕궁)에 야습을 행했다. 이 때의 어소는 아직 건설이 완료되지 않아, 침입이 쉬웠고 , 또한 밤에는 경비도 허술했다고 한다.
 이변을 깨달은 요시테루는 , 수집 하고 있던 고금의 명검 수십개를 챙겨 들고, 칼집에서 뽑아 마루에 꽂아 놓고 적과 싸웠다. 계속해서 달려드는 적을 베며 , 도의 예리함이 무디어지면, 꽂아 놓았던 칼을 뽑아 , 다음 적을 베었다고 한다. 일설에 의하면 , 요시테루가 너무나 강했기 때문에 , 적병들은 검으로는 쓰러뜨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, 문짝이나 다다미를 넘어뜨려 요시테루를 무겁게 하여(혹은 깔리게 하여) 움직일 수 없게하고 , 거기에 창으로 찔러 간신히 쓰러뜨렸다고 한다(자해 했다는 설도 있다). 덧붙여서 , 요시테루의 죽음에 관한 구(문구)는 아래와 같다.

「5월의 비(장맛비)는 이슬인가 눈물인가 두견새여 나의 이름을 높여 구름 위까지」
「五月雨は 露か?か 不如? 我が名をあげよ 雲の上まで」

 장군과 무로마치 막부의 복권을 위해 힘쓴 한 검호 장군의 무념이 , 잘 전해져 오는 구이다.(번역자는 모르겠음..ㅡㅡ)

다이한냐 나가미츠(大般若長光-대반야장광)

 요시테루가 소유한 대표적인 칼로는 , 다이한냐 나가미츠가 있다. 이것은 비전 오사후네 나가미츠가 단련한 칼로 , 그 중에서도 명검중의 명검이라고 하는 명품이다. 덧붙여서 「대반야」라는 이름의 유래는 , 무로마치 시대의 감정가격으로 「600관」이라는 고가로 매길수 있었는데,반야불경이 「600권」이라 이를 붙여서, 다이한냐 나가미츠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. 또한 이전에 소개한 아즈키나가미츠의 형제에 해당하는 명검이다.
 당시 , 권력자들은 미술품으로서 일본도를 좋아했다. 예리함은 당연한 것이고, 작풍이 좋았던 다이한냐 나가미츠는 , 미술품 수집가에게는 군침도는 명검이니, 요시테루 사후에 다양한 유력자의 손에 떠돌아 다니게 되었다. 이후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넘겨졌고, 나가시노의 전투에서 공훈을 세운 오쿠다이라 노부마사(?平信昌)에게 하사 하였다가, 이윽고 이에야스의 양자가 된 마츠다이라 타다아키라가 계승하였다.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마츠다이라가에 보관되고 있었지만 , 후에 유출. 쇼와 14년에 황실 박물관(현 도쿄 국립 박물관)이 소유하게 되었다. 당시 도쿄도지사의 월급이 5350엔이였는데, 5만엔의 값이 붙었다고 하니 , 역시「대반야(다이한냐)」나가미츠다 라고 했다.
 덧붙여 옛날 일본도는 , 사용하다가 닳아서 짧아지게 된 경우도 많았지만, 다이하냔 나가미츠는 당시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도 큰 매력. 인장(날길이) 73.6cm의 명검은 , 가치 , 모습 모두 옛날과 다르지 않은채, 현존 하고 있다


<차회예고 : 시시오 (사자왕)>

출처 : www.4gamer.net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 글 : Murayama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 번역 : ffotagu